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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rch for Historical remains (역사를 찾아서)

강진 영랑 생가

by 리치엔나 2022.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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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랑생가

강진에 오면 문학과 예술의 혼이 살아있는 곳 같은 느낌이듭니다. 강진 시가지 전체가 관광지 처럼 잘 다듬어져 있어 어느곳을 가든지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가 있는 곳 인 것 같았습니다. 이곳 강진은 우리가 학교 다닐때 배웠던 현대 시문학의 선구자인 영랑 김윤식 선생님의 생가가 있는 곳입니다. 오래전 이곳에 영랑 생가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 조그마한 초가집 몇채 달랑있어 "이런 쬐그마한 초가집에서 영랑이 태어났어." 하고 으아해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인물 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때 현대시의 선구자로 입이 달토록 외웠던 시가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였습니다. 영랑은 역사적으로 훌륭한 시인이기때문에 제가 근무하던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 체험학습을 오기도 했습니다. 그때보다 시설이 많이 늘었고 터도 넓어져 관광객들이 와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시설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은 영랑 김윤식 시인의 생가입니다. 영랑시인은 역사상 아주 훌륭한 시인이기 때문에 영랑시인의 일대기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기록을 보고 옮겨 적어 볼까 합니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대표서정시인 이자 항일 민족지사였던 영랑 김윤식 선생(1903~1950)의생가 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1903년 1월 16일 부친 김종호와 모친 김경무 사이에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3월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이듬해 상경하여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수학한 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휘문의숙 재학시절이던 1919년 3월1일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자신의 구두안창에 독립선언문을 숨겨놓고 강진에 내려와 독립운동 ( 강진 4ㆍ4운동 ) 을 주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 등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에서 수학한 선생은 용아 박용철 선생등과 친교를 맺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에 시 창작활동에 몰두하였다. 영랑은 1930년 3월 창간한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전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과 더불어 우리 현대시의 새 장을 열었다. 1934년 4월 [문학]지 제 3권에 불후의 [모란이 피기 까지는] 을 발표하였으며 1935년 [영랑시집]을 1949년에는 [영랑 시선]을 출간 하였다. 선생은 조국해방이 이루어질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및 삭발령을 거부한채 흠결없는 대조선인으로 외롭고 의롭게 살았다. 광복후 신생 조국정부에 참여 하였다. 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때 부상당하여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은 생애 87편의 시를 남겼다. 영랑생가는 1948년 선생이 서울로 이사한 후 몇차례 전매되었으나 강진군이 매입하여 1982년 2월 전라남도 지방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10월 국가 지정문화재로 승격되었다. 정부는 2008년 선생에게 금관문학헌장을 수여 하였다.

당대 최고의 시문학자인 영랑선생님이 이곳에서 태어 났다니 이 집이 탯자리가 아주 좋은 집인가 봅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정황으로 볼때 고을 안쪽에 깊이 자리하고 있어 집이 안정감이 있고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옛 말에 사람은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는 말이 맞는가 봅니다. 서울로 가셨으니 당대 최고의 시 문학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 1 ) 주차장

이곳은 영랑생가를 관람하러오는 자동차들의 주차장입니다.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영랑생가에 찾아오지만 봄ㆍ가을 소풍철에는 많은 학생들이 체험학습을 하기위해 영랑 생가를 찾아와 관람하고 돌아갑니다.

( 2 ) 안내소

영랑생가를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표지판이 크게 설치되어 있습니다. 전에 왔을때 영랑생가가 어디인지 몰라 가지고 헤메고 다녔었는데 표지판을 크게 설치해 놓으니 금방 찾을 수 있었습니다. 관광객들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해 놓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은 강진군 관광안내소 인것 같습니다. 강진을 여행하시는 분들은 이곳에 오셔서 알아보시면 강진여행을 더 쉽고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3 ) 샘물

영랑생가 오는길에 탑골샘이라는 우물물이 있습니다. 우물물은 추억이 깃든 샘물 인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때는 수돗물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일과 처럼 우물물에서 물을 길러 양동이에 담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날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곳은 깊은 우물물에 두레박이나 바가지를 넣어 물을 길렀던 곳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도 시설이 보편화되면서 어느 곳이나 지하 땅속에 저장된 물을 끌어 올려 수도 시설을 만들어 사용하기도하고 수원지나 댐에서 정수한 물을 하수도관을 통해 물을 끌어와 우리 가정의 수도시설에 연결하여 편리하게 물을 사용하도록 하기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물을 사용합니다. 세월이 참 많이 발전하여 문명을 발달시키고 많은 부분이 변화 되어져 우리가 생활하면서 편리하게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 4 ) 시문학 기념관

영랑생가 아래에 시문학파 기념관이 있습니다. 들어가 보지 않아서 뭐가 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아마도 현대시의 탯줄 시문학 거장들의 작품이나 그들의 삶의 기록물이 전시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봅니다.

이곳에 한국 현대시의 탯줄 인 시문학의 거장들이 한데 모여 사진과 함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책에서 배워 익히 아는 사람들이지만 이곳 커다란 아내판 벽에 쓰여 있는 내용을 나열해보면

한국 현대시의 탯줄 [시문학]
시문학은 1930대 카프 (KAPE)의 정치성이나 사상성을 배제한 순수서정시를 지향하고자 1930년 3월 5일 창간 하였다. 핵심 시인은 영랑 김윤식. 용아 박용철. 정지용 이며 여기에 위당 정인보. 연포 이하윤 의 참여로 창간호가 발행되었고 뒤이어 수주 변영로 김현구가 제 2호 (1930. 5. 20 )에 신석정 허보 가 제3호 (1931. 11. 11 )에 동참 하였다. 시문학은 우리나라 순수 문학 운동의 기반을 다졌으며 이후 [시원](1935)과 [시인부락] (1936)으로 이어지면서 1930년대 한국현대시의 핵을 형성하었다.

사진은 앞줄 왼쪽 부터 김영랑 정인보 변영로
뒷줄 왼쪽 이하윤 박용하 정지용

( 5 ) 감성 강진의 하룻길

네이버 블로그 쿠니에서 인용


감성강진의 하루길 표지판이 보입니다.
이길은 영랑과 다산의 예던(가던)길 이라고 합니다. 영랑과 다산은 민족의 애완이자 자부심이였고 시대를 초월한 민족의 큰 스승입니다. 두분의 고뇌와 철학이 이길에 쓰며있어 이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공감과 감흥을 준다고 합니다. 한번도 이길을 가 본적이 없기때문에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길을 가본 분들의 느낌이 나의 느낌일 거라 생각 합니다. 하루쯤 머물면서 자세히 보고 이길을 산책하며 걸어 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 6 ) 영랑의 시

영랑생가에 영랑의 시가 암석에 적혀 있네요. 이시도 학교 다닐때 외운 시 입니다.

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우에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돌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우에
오날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붓그림가치
시의 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십다.

우리가 배울 때는 맞춤법이 바르게 표기된 표준어로 된 시를 배웠는데 원문 그대로 옮겨 놓은 시 인 것 같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봄을 기둘리고 잇슬 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 버린날
나는 비르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로 무덥든날
떠러져 누은 꼿님마져 시드러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어지고
뻐처 오르든 내 보람 서운케 문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시인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 원문이 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배울때는 맞춤법이 바르게 표기된 표준어로 된 시를 배웠기 때문에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옛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용어이기때문에 그것도 시어 이기 때문에 참고 하셔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곳은 영랑생가 들어가는 문입니다. 안채가 있고 사랑채가 있는데 잘은 모르지만 사랑채는 영랑이 머물렀던 곳 인 것 같습니다.

영랑생가 사랑채입니다.

( 7 ) 시인 김현구

영랑생가 앞 벽에 시인 김현구 에 대하여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시인 김현구 ( 1903.11.30~1950. 10.30 )는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서성리 179번지에서 태어 났다고 합니다. 1930년 5월 시문학 2호에 [님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물위에 뜬 갈매기] 거룩한 봄과 슬픈 봄] [적멸] 등 4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고 합니다. 그 뒤 문예 월간과 문학지를 통해 1934년 4월까지 8편에 시를 더 발표하였다고 합니다. 1935년 시문학사에서 [정지용시집] [영랑시집]에 이어 현구 시집을 발표하려 했으나 박용철의 와병(1938년사망)으로 무산 되었다고 합니다. 뒤이어 1949년 공보처 출판 국장으로 있던 영랑에게 시집발간을 의뢰 하였으나 6.25동란으로 또 좌절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1970년에 아들 원배등에 의해 현구 시집 (유고 70편 발표작 12편 등 82편 수록)이 비매품으로 출간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알려지지 않은 시대의 영웅들이 많은데 안타깝게 시대의 흐름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 이곳 강진 영랑생가 한쪽 벽에 새겨진 이름이지만 시인으로써 당대 최고의 문학인이 아니였나 짐작됩니다.

시인 김현구의 대표적인 작품 8점이 벽에 걸려있는데 문학인으로써 널리 알려지지 못한 아쉬움이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못다 부른 시인의 노래 후손들이 불러 영혼히 아름다운 노래로 길이 남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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